너무 눈부셔서 사진 촬영을 포기하고 싶었던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카메라 셔터 스피드 값이 최대 1/8000 속도까지 나올 뻔하여 나의 카메라가 놀라 당황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던 그날의 한 컷이다.
셔터 스피드 값이 높게 나온다고 하여 흔들림 없는 사진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기후도 '적당히'라는 것을 배웠으면 좋겠지만 내가 '제우스'가 아니라서 해결할 수 없다.
2022년 4월 6일 제주도 한라수목원에서 케빈(야생 수컷 노루 별명)을 3일 연속 만나는 행운을 얻게 되어 행복했던 하루였다.
여전히 홀로 아름다운 자연 속에 파묻혀 내가 온 것도 모른 채 아름다운 정원 안에 갇혀 꽃을 따먹고 있는 케빈(야생 수컷 노루 별명)의 모습은 마치 결점을 감추기 위해 화장을 진하게 하여 남성을 유혹하는 여성들의 가식적인 얼굴처럼 아름다워 보였다.
나뭇 가지 사이로 보이는 케빈(야생 수컷 노루 별명)의 모습을 촬영하기 위해 나는 무릎과 고관절을 혹사시켜 가며 땅바닥에 쭈구려 앉아 기다리고 기다렸다. 내가 원하는 위치에 올 때까지 기다림과 노름을 하지만 서서히 한쪽 다리에 혈액이 공급되지 않아 다리를 절단할 위기까지 올 수 있는 상황까지 가는 것은 아닌지 두려웠다.
나는 이날 사진관 대표 그리고 사진작가들에게 기다림의 뜻을 직접 물어보지 않아도 케빈(야생 수컷 노루 별명)에게 직접 배울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다. 솔직히 사진작가들에게 배울 게 없다. 그 이유는 다들 자신이 잘난 맛에 살기 바쁜 인간형이라 그들에게 배움을 받고자 한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본인 스스로 실전에서 직접 몸을 희생하여 배우는 것이 마음과 몸이 기억할 수 있어 허세에 찌든 사진작가들에게 듣는 것보다 현명하다. 제주도 한라수목원 주차비 단돈 500원을 투자했을 뿐인데 '기다림'의 뜻을 정확하게 전달해 준 케빈(야생 수컷 노루 별명)이 오히려 나의 유일한 스승이다.
사진 생활이 겉은 화려하고 멋있어 보이지만 그 이면에 감춰진 삶은 고통과 외로움 그리고 마지막에는 병원 원장님이 나를 기다리는 삶을 반복하는 시간의 연속이다. 이날은 오랜 시간 동안 쭈구려 앉아 케빈과 소통하는 시간이 길어져서 촬영이 끝나자마자 병원으로 직행하여 오랜만에 병원 의사를 만나 서로에게 따뜻한 덕담과 안부를 나누기도 하여 그날은 '1+1 행복'을 안겨준 하루다.
산부인과만 빼고 모든 병원을 회사 출근하듯 방문하는 나의 신체적 결함의 시작은 어머니 자궁에서부터 이미 결정되어 운명처럼 태어난 것 같다. 이제는 받아들이려고 노력 중이다. 신체적 결함도 선택받은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
가급적이면 부자 집안에서 태어나고 싶었지만 그건 내가 원해서 태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설명하기 어렵다. 하지만 방법은 있다.
재벌 집 막내아들 드라마에서 부회장 아들 진성준이 비서에게 던진 대사 한 구절이 문득 스쳐 지나간다.
"다시 태어나세요~"
정답이다.
다시 태어나면 되지만 그것 또한 쉽지 않다. 역시 드라마가 가끔 삶의 지혜를 쪼금 던져주기도 하여 순간 마음이 뭉클하다.
아무리 취미생활이지만 시답지도 않은 사진 생활을 오랫동안 해오면서 나에게 남은 것은 한량 한 야생 노루들 사진과 자연을 통해 인간들에게서 배울 수 없는 깊은 울림을 얻을 수 있어서 그나마 내가 지금까지 암에 안 걸리고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의 이유다.
케빈을 만나면 행복보다 항상 나에게 고통과 아픔 그리고 마지막에는 병원 의사가 나를 기다리게 해주는 길을 열어주지만 자연이 던져주는 배움은 무조건 달콤하지 않다는 것도 케빈(야생 수컷 노루 별명)을 통해 알 수 있었던 긴 세월이었다.
이날 내가 찍고자 하는 피사체는 인간이 아닌 야생 노루라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원하는 위치에 피사체가 오기를 바라는 마음은 기다림의 싸움이 아닌 소통의 시간 속에 젖기 위한 공간과 싸움이다.
노루들은 한국어를 모르기 때문에 그들의 언어를 배우지 않는 이상 소통하기 힘들다고 생각하겠지만 자연 앞에서는 자신의 주접떠는 입을 막고 가만히 그들의 삶을 지켜보며 기다리는 것 자체가 소통으로 가는 길이 열릴 수 있다는 것을 명심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사진은 호들갑 잘 떠는 인간과 단세포들은 절대 취미조차 접근할 수 없는 분야라서 함부로 덤빌 수 있는 종목이 아니다. 가끔 입으로 사진을 찍는 인간들이 자주 목격되어 나의 사진 촬영에 적지 않게 방해를 받기도 한다. 그들은 입이 셔터 버튼이라서 항상 시끄럽다.
케빈과 소통의 시간이 꽤 흐르고 드디어 내가 원하는 위치로 이동한 케빈을 향해 숨을 참고 기다림이 낳은 마비가 된 오른쪽 다리를 붙잡고 마지막 한 컷을 속 시원하게 기록했다.
찰칵~
성공이다.
원하는 한 컷을 찍다가 언젠가는 세상과 작별할 수 있다는 생각도 망설임 없이 하게 된 그날이다.
자신이 촬영하고자 하는 피사체를 목격하게 되면 촬영하기 전 자신이 찍고자 하는 이미지를 미리 머릿속에서 상상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원하는 사진을 얻을 수 있고 원하는 사진을 얻기 위해 촬영 장소도 미리 세팅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촬영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그런 다음에 피사체를 생각을 해도 늦지 않다.
그날의 아름다운 촬영 시간은 곧 행복을 넘어 '기다림'의 뜻을 정확하게 알려 준 케빈(야생 수컷 노루 별명)에게 아직도 감사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마치 감동이 베여있는 영화 한 편을 감상 후 깊은 여운이 오랫동안 지속되는 것처럼 시답지도 않은 인간에게서 배운 울림이 아닌 야생 동물에게서 얻은 배움이 더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을 새롭게 알 수 있었던 소중한 하루로 기록되는 날이었다.
노루 한 마리에게서 수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50년 동안 찐따, 삐꾸들과 접촉하면서 느껴보지 못했던 울림을 척박한 자연속에서 시원한 바람과 마음이 교차하며 발생하는 울림은 책에서도 배울 수 없는 신비로운 이야기들이 앞으로 많이 펼쳐져 있기 때문에 기대해도 좋다.
다음 생에는 고달픈 인간이 아닌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케빈(야생 수컷 노루 별명)과 닮은 한 마리 야생마처럼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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